살아 있는 제물이 되십시오 (로마서 12:1-2)
(온누리교회 이재훈목사)
도입: 로마 제국과 그리스도인에 대한 오해
주후 112년, 로마 비투니아 지역을 관할하던 총독 플리니우스가 당시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보낸 보고서에는 당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담겨 있습니다. 플리니우스는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던 사람들을 신문하고 핍박한 내용을 황제에게 보고했습니다. 그 보고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다음과 같습니다.
정해진 날 새벽마다 모여 그리스도를 신으로 여기며 그에게 찬송을 부름.
비이성적이고 흑암적인 미신이며 전염성이 강한 미신이므로 끝까지 기독교인임을 주장한다면 처형하도록 명함.
로마 제국은 당시 그리스도인들을 '신이 없는 자들(무신론자)', 즉 '미신을 따르는 자들'로 평가했습니다. 로마 제국의 눈에 비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신전이 없었고, 신전에 받쳐진 제단도, 재물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제단을 쌓지 않은 이유는 가난하거나 박해가 두려워서가 아니었습니다. 그 답은 오늘 우리가 읽은 로마서 말씀에 있습니다. 그들의 삶이 곧 제단이요, 그들의 인생이 곧 하나님께 드려진 살아 있는 제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의 구조와 '그러므로'의 의미
로마서 12장 1절~2절의 말씀은 로마서 전체의 경첩과 같이 앞뒤를 연결해 주는 말씀입니다. 1장부터 11장까지 바울은 복음의 진리를 쌓아 올렸고, 그 긴 등반의 정상에서 논증을 멈추고 찬양을 터뜨립니다.
[로마서 11:33] "깊도다! 하나님의 부요와 지혜와 지식이여, 그분의 판단은 헤아릴 수 없으며 그분의 길은 찾아낼 수 없다"
죄인 된 인간, 하나님과 원수 된 인간을 구원하시고 만물을 구속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그 지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이루신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부요하신 은혜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2:1]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내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영적 예배입니다."
'그러므로'라는 단어는 앞에 11장을 하나로 묶어서 짊어지고 연결하는 것입니다. 로마서를 산으로 비유한다면 1장부터 11장까지가 정상까지 오르는 것이고, 12장부터는 다시 내려오는 것입니다. 내려가는 것도 등반의 일부이듯, 정상에서 본 것을 자신이 살고 있는 현장으로 가지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복음의 진리와 우리의 삶은 한 산의 두 비탈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삶을 요구하기 전에 그렇게 살 수 있는 능력과 근원을 제공해 줍니다. 세상의 도덕과 철학 사상은 그렇게 살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해 주지 않지만, 복음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려주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살 수 있는 능력의 근원을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비하심입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살아 있는 제물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한다" 본문에 나오는 이 자비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쓰였습니다. 히브리인들은 크고 장엄하고 웅장한 것, 풍성한 것을 말할 때 복수를 붙여서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풍성하신 자비, 죄인을 의롭다 부르시고 자녀로 부르시며 하늘의 모든 상급을 주시며 만물을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들을 함께 모아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 자비하심에 대한 감사가 바로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만일 단순한 의무감,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얼마 가지 못합니다. 지치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한 감사가 우리의 삶을 움직인다면 그것은 지치지 않으며 계속해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은혜라는 단어와 감사라는 단어는 같은 뿌리를 가집니다. '카리스(은혜)'에서 '유카리스티아(감사)'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논리적으로 당연한 것이지요. 감사는 은혜를 깨달을 때 나오는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근거하여 주어진 권면은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구약의 제사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산 제물'이라는 단어 자체가 모순적인 용어입니다. 제물은 구약에 의하면 죽어짐으로 드려지는 겁니다. 피를 다 빼고 드려지고, 불태워져 드려지고, 껍질을 벗기고 각을 떠서 드려지고, 모든 기름도 다 구별되어 불태워져 제단의 제물로 드려지는 것은 살아 있는 것은 절대 불가능합니다. 죽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14] "그분은 단 한 번의 제물로 거룩하게 된 사람들을 영원히 온전하게 만드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단번에 속죄의 제물이 되셨기 때문에, 우리는 죄를 씻는 제사, 죄를 용서받기 위한 제사가 아니라, 속죄제가 아니라 감사제가 된 것입니다.
또 구약과 달라진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제사장과 제물은 항상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제사장과 제물이 같습니다. 내가 곧 제사장이요 내가 곧 제물이 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이시며 동시에 제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 설교자 크리소스톰도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각자가 자신의 제사장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제사의 불은 제물을 태우는 것이 아니라 살립니다." 성령의 불은 드려진 사람을 태워 없애지 않고 새사람으로 일으키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의 진리는 그리스도와 연합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우리의 옛사람도 함께 죽었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실 때 우리도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연합한 자가 되고,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연합하여 다시 살아난 존재입니다.
[로마서 6:13] "또한 여러분의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처럼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며 여러분의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그러므로 살아 있는 제물이란 옛사람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에 넘겨졌고, 새 생명으로 살아난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죽음을 통과한 생명만이 살아 있는 제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몸'의 의미와 영적 예배
당시 헬라 세계에서는 몸을 죄악시했고, 플라톤의 이원론에 근거해서 몸을 무덤으로 비유했습니다.("몸은 곧 무덤이다") 그런데 그 몸을 드리는 것이 곧 거룩한 산 제사요 살아 있는 제물이라는 것은 구약적 사고방식으로도, 헬라적 사고방식으로도 모순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몸을 어떻게 보십니까? 이 몸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몸이며, 성자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셔서 입으신 몸이며, 성령이 임하심으로 거하시는 성전이며, 마지막 날에 영광스럽게 될 몸입니다. 우리 몸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라 그 몸 안에 배여 있는 옛사람이 악한 것입니다.
우리의 몸이 곧 성전입니다. 우리가 모이는 이 예배당 자체가 거룩한 것이 아니라 성전이 된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그 성도들이 거룩한 제물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우리 몸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기에 우리 몸이 드려지는 것이 곧 거룩한 산 제물이 된다고 분명히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왜 몸을 드리라고 했습니까? 마음은 숨길 수 있어도 몸은 숨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몸은 구체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손을 제물로 드리면 그 손은 다른 사람의 연약한 어깨를 일으켜 주고 그 넘어진 자를 다시 세워주는 손이 됩니다. 우리의 발을 살아 있는 제물로 드리면 그 발은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하는 발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입술과 혀를 살아 있는 제물로 드리면 그것은 누군가를 비난하고 헐뜯는 것이 아니라 축복하고 살리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몸을 드리는 것이 곧 영적 예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헬라어 원문에 보면, '영적'이라는 단어는 이성과 말씀을 뜻하는 '로기코스'에서 유래했습니다. 즉, 절대적으로 옳은 이치에 합당한 예배라는 뜻입니다.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 번역에서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여러분의 일상의 삶, 곧 자고 먹고 일하고 걸어 다니는 삶을 하나님께 봉헌물로 드리십시오." 우리의 모든 일상, 먹고 자고 깨고 드리는 모든 생활이 곧 영적 예배여야 합니다. 잠시 모여서 드리는 이 공예배 이후에 흩어지는 시간은 끝나는 시간이 아니라 일상의 예배의 시작인 것입니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로마서 12:2] "여러분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십시오."
'이 세대'는 지금 흘러가고 있는 이 시대를 의미합니다. 이 세상 자체는 악한 것이 아니지만, 이 세상을 주관하고 있는 정신, 사상, 철학은 악합니다. 하나님 없는 이 세상의 철학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의 틀에 짬 맞추려고 합니다. '본받지 말라'는 것은 이 시대가 만들어 놓은 틀에 우리가 부어져서 모양대로 굳어지지 말라는 겁니다.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은 우리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이 새로워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서고 우리의 옛사람을 십자가에 넘겨 줌으로 우리에게 태어난 새 생명으로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이 변화는 내가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변화되어지는 수동태이며, 본질적인 변화입니다. 마치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나의 옛사람은 십자가에 넘겨주고 부활의 생명으로 태어난 날아가는 존재가 되는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세 번째로 주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국 성경의 번역은 명령어로 되어 있어서 "분별하도록 하라"고 하니 율법적인 명령어로 생각하기 쉽지만, 원문의 뉘앙스는 이 분별이 선물로 주어지는 결과라는 점입니다.
변화가 먼저 일어나고 헌신이 따르는 것 같지만, 실제 영적인 변화는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릴 때 놀라운 변화가 체험되고 비로소 분별이 이루어지는 순서로 진행됩니다. 내 삶에 분별력이 없는 것은 몸의 헌신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결론: 평생의 발걸음이 되는 영적 예배
'나를 따르라' 시리즈 12번의 설교는 로마서 6장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난 연합으로 시작하여, 우리의 몸을 산 제물로 드리라는 부르심으로 끝을 맺습니다. 이러한 헌신은 하루의 감격이 아니라 평생의 발걸음이 되어야 합니다.
본회퍼가 처형장으로 끌려갈 때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이것은 끝입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생명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평생을 그리스도를 따르다가 마지막 숨을 거두는 때가 끝인 것 같지만 아닙니다. 우리는 영원히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로,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2000년 전 로마 제국은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제단을 발견하지 못해서 그들을 무신론자라, 미신이라 평가했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서 제단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못해야 합니다. 만일 오늘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종교적으로 신전과 제단과 재물이 무엇인지가 분명하게 드러난다면 우리는 종교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지 신앙생활을 하는 게 아닙니다. 도리어 우리의 삶이 우리의 인생이 제단이 되고 재물이 되는 것으로 나타나야 우리는 진정한 제자도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앞서 이 길을 걸어가신 그리스도께서 '나를 따르라' 부르시는 이 부르심 앞에 온전히 순종함으로 우리도 거룩한 산 제물로, 살아 있는 제물로 주께 드려지는 귀한 삶이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